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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세미나-素石 이철승이 본 解放에서 建國까지
관리자 2008-09-16 7,160
<정책포럼-2008.9.5> 憲政60주년 기념 정책포럼 素石 이철승이 본 解放에서 建國까지(강연錄) 험난한 건국의 길 개척한 雩南 이승만 그가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李哲承(헌정회 회장) “나는 해방과 건국시대의 막내로 투쟁했다” 건국 60주년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고 개중에는 시비하는 견해도 더러 있다. 일전 학계의 중진인 송복 교수가 건국단체 모임에서 강연한 데 따르면 일반적으로 “영토와 국민과 주권이 갖추어져야 국가로 인정된다”고 정의했다. 국가의 요건을 이론적으로 잘 정리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 이전의 임시정부는 3.1정신을 이어받아 출범했고, 헌법 전문에도 명기됐듯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음을 분명히 못 박았다. 우연하게도 임정의 최고 요인들이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을 맡게 돼 인적 계승도 자연스럽게 이뤄진 셈이다. 이승만 박사는 초대 국회의장과 초대 대통령을, 해공 신익희 선생이 그 뒤를 이어 국회의장을 했다. 그 두 분들이 임시정부 주석도 하고 내무부장관도 하신 분들이다. 건국 초기에는 임정 요인들이 다수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그 중 조소앙 선생과 김구 선생은 남북 협상을 하기 위해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을 했다. 그러나 두 분의 생각은 달랐다. 조소앙 선생은 “북한에 가보니 김일성과 소련의 병영이더라. 언제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명분 때문에 김구 선생과 같이 평양엘 갔지만 사태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분이다. 조소앙 선생은 그 뒤 대한민국의 헌법 하에서 시행된 2대 국회총선 때 성북구에서 출마하기도 했다. 해공 선생은 현실적이었던 반면 조소앙 선생은 명분을 많이 따졌다. 김구 선생은 그 당시 한독당과 한민당의 대리인이었고 고하 송진우 선생은 한독당의 조직부장을 지냈다. 임시정부 주석을 맡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은 형제지간의 의를 맺을 만큼 가까웠다. 반탁운동 때만 해도 두 분은 형님 동생 하는 것을 나는 여러 차례 들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반탁위원장, 김구선생은 부위원장을 나눠 맡았고, 국내파의 인촌 선생이 국무총리 같은 입장으로 독립촉성국민회, 민족본부를 만들어 미소공동대표와 협의하는데 나섰다. 그런 분들이 주도해서 해방정국을 끌고 나갔던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이 이철승이는 해방과 건국시대의 막내였다”. 이 말은 내가 해방공간과 건국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관통하는 동안 이승만 신익희 김성수 선생 등을 옆에서 보좌하며 열혈청년의 애국심으로 종횡무진 뛰어다녔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생존하고 있는 정치인 가운데 나만큼 그 당시를 경험한 이도 드물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걸어 온 길은 당시를 그대로 투사한 역사의 기록이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1922년 일제 식민통치시대에 전주에서 태어났는데 선친께서는 공업전문학교를 다니면서 3.1운동을 하다 퇴학당해 평생 일제시대 낭인으로 계시다 돌아가셨다. 나는 일제시대 전주고등학교를 다녔고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했는데, 졸업반 때 일본 고이소 총독이 한국인들도 일본 전장의 앞잡이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일본전문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은 징병으로 인해 더 이상 장교를 편성할 수가 없었고 보충병을 뽑을 수 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청장년들의 징용징발제도를 만들어 강제 징용에 나섰다. 고등학교 대학 다니던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당시 고이소가 학부형들에게 압력을 넣고 회유책을 쓰고 친일파 공무원들을 강연에 동원했는데 이광수, 최남선씨 같은 분들도 일본에 가서 학병 건의 운동을 하고 다녔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일본 외무부에 대사로 간 박모라는 담양 사람과 일본 공무원들을 통해서 카이로 포츠담회담과 얄타 밀약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나는 인촌 선생한테 인사하고 다니는 가운데 그런 정보를 듣고 있었다. 한국 독립이 되어가지 않겠느냐 하는 중대한 정보도 있었는데 일부 지도자들은 일제 말부터 그런 정보에 접해 있었다. 그 무렵 일제는 강제로 우리에게 학병을 가라고 독촉했지만 몇몇 동지들은 학병 거부 운동에 나섰다. 우리의 학병 거부운동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이소 총독은 정무총감에게 갖은 방법을 동원해 학병 지원율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각 대학 학생대표들이 지하에 모여 학병 지원 거부운동을 전개하는 바람에 지원율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 때 우리 그룹 중에 어떤 전문학교 대표가 학병거부운동으로 지원율을 늦추고 있다고 자랑삼아 자기 외숙한테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 외숙이 친일파라 정무총감한테 그 말을 옮겨 고이소가 알게 됐다. 고이소 日총독 만나 학병 강제징병 따져 고이소는 학병 거부 운동하는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며 우리 비밀조직에 연락을 취해 왔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생들이 고이소를 만났다가는 회유나 당할 우려가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몇몇은 고이소를 만나서 할 이야기는 해야 한다고 주장해 격론 끝에 일단 면담해 담판을 짓기로 했다. 이왕이면 전장에 가서 죽을 바에야 할 얘기를 하자고 지금 청와대 자리에 사무실을 갖고 있던 고이소 총독을 담판하러 갔다. 우리가 왜 차별을 받아야 하나? 일본 학생들은 취직도 잘 되고 일본 공무원들은 월급도 한국인보다 배로 받고 있지 않느냐? 한국 사람을 억압하고 차별을 하고 농민들을 착취하고 이게 식민정책이냐? 고 따졌다. 우리의 말을 다 듣고 난 고이소는 “한국인을 차별 대우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한국인들의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럼 왜 필리핀이고 동남아 국가들은 모두 독립시켜 주면서 왜 유독 한국만 독립을 시켜주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일본과 한국은 ‘同祖同根’이다”며 식민지화를 정당화했다. 한국과 일본 사람은 조상이 같고 뿌리가 같다며 일본과 똑같이 지도적 입장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독립을 할 것 뭐 있느냐고 했다. 또한 그런 면에서 학병제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 손지태 선생, 장덕수 선생, 김승용 선생이 한마디씩 했다. 고이소가 하도 학병을 강요하니까 인촌 선생은 “나는 교육을 맡았지만, 군대에 가라마라 하는 것은 맡은 일 없다”고 했다. 류마티스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송진우 선생은 우리더러 반대 운동하라고 독려했다. 그런데 매일신보가 엉뚱하게 인촌 선생이 학병에 가라고 했다는 기사를 썼다. 그로 인해 해방 후 인촌 선생에게 친일파니 하는 구설이 따랐다. 사실 인촌 선생은 학병 거부 입장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연대장이 일본 천황이 중대한 연설을 하니 연대에 모이라고 했다. 한국인 학병 친구 6명이 병영으로 쓰고 있던 와까야마 국민학교로 가 일본 천황의 연설을 들었다. 우리는 못 알아듣는 척 하고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인 중대장은 “더 열심히 하라신다”고 둘러치는 게 아닌가. 사실은 “항복한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우리에게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병영 밖에서는 일본인 하사관이나 장교들이 칼을 빼들고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장교들에게 일본 천황이 항복을 했으니 우리나라로 가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우리는 잘못하다간 저들이 뺀 칼에 희생될 수도 있으니 가만히 있자고 했다. 얼마 뒤에 일본인 상급자가 쌀은 얼마든지 가지고 ‘하고다’로 가라고 지시했다. 하고다로 가보니 한국인 징병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부랑자도 눈에 띄어 안 되겠다싶어 한국행을 감행하게 됐다.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일본 해군 중위를 설득해 60톤짜리 어선을 사서 일본군에 징병으로 끌려간 한국인 200여명이 간신히 승선했다. 그때 일본 해군 중위는 사실 안 된다고 했지만, “우리가 가야만 만주와 중국 등에 나간 너희 공무원과 군인들이 부산과 여수항을 통해 귀국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현해탄을 건너오는데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일엽편주, 그러나 꿈에 그리던 여수항에 8월 27일 도착했다. 하루라도 빨리 우리나라 건국하는데 이바지하자는 일념 하나였다. 각자 부모님들을 만나 뵙고 서울서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전주로 가서 조상님께 성묘를 하고 부모님을 만나 뵙고 약속대로 사흘 만에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 와보니 약속한 사람들이 거의 안 왔다. 이유인즉 잡혀가거나 부모에게 잡혀서 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서울로 올라와 보니 종로 화신에 여운형씨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이름이 그럴 싸 해보였다. 전국적으로 인텔리 지도층들이 지부를 조직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뒤에는 박헌영의 공산당이 있고 여운형을 앞세워 이름 좋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건 것이다. 당시 일반 사람들은 선배들이 좌익이면 좌익이 되고 삼촌이 우익이면 우익이 되는, 그랬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공산주의고 우익이고 민족주의고 별로 모르는 때였다. 먼저 조직의 지도자와 선배들에 따라 갈라지는 판이었다. 나는 다행히 인촌 선생과는 집안 간에 오랜 세교가 있어 그 분을 뵈러갔고 또 중부님이 한민당의 재정부 장관이어서 자연히 우익진영을 찾게 되었다. 인촌 선생께 인사를 갔더니 “이제 돌아 왔는가?” 라며 따듯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러다 반탁운동이 일어났다. 송진우 선생과 나는 인촌 선생 보디가드를 하고 계동에서 먹고 자고 했다. 그런 관계로 나는 민족진영 우익진영의 청년대표로 활동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나 같이 항일 저항운동을 했다. 그래서 보전에서도 경제학과의 박극회 선생이라든지(후에 김일성대학에 갔다), 연전의 윤형준 선생이라든지, 경도학파로 유명한 사회주의 객관학파 경제학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고 장덕수․안호상 선생 등의 법학부에선 우익이 양성됐다. 우리는 일제시대 학병을 가서 한참동안 공리공론을 했다. 일본이 망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해양 세력과 붙어야만 사는 것 아니냐? 중국하고 소련하고 대륙에 붙어 있는데, 거기하고 손을 잡아야 하지 않느냐? 이런 저런 공리공론들을 많이 했다. 서울에 와 보니 좌익들이 먼저 주도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일제시대 나하고 같이 학병 거부운동 하면서 고이소 총독까지 만난 경성제대 출신인 이혁기 대표는 평양 부대로 갔다. 그는 나중에 도망 나와 유진오 선생(경성제대 선배)한테 가서 내 안부를 물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이혁기는 해방이 되니까 바로 국군경비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좌익이 해방되면서 먼저 무력부대부터 잡아야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또 공산주의 좌익들은 학병동맹을 만들었다. 學盟과 建準에 맞서 우익 학생운동 이끌어 나는 은밀하게 건준 명단을 뽑아 보았다. 공산당 핵심들은 차장급으로 배치해 놓고 인촌, 이승만, 김구 등 지도자들은 본인들의 승낙도 안 받고 대외적으로 명단을 발표했다. 학병동맹 지도부에선 인민공화국 지지 데모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무슨 근거로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데모를 하느냐?”고 따졌다. 그들 핵심 분자들은 이북으로 넘어갔다. 학맹 잔류파들은 권총을 휴대하고 다녔는데 대전 출신의 국회의원을 지낸 김종회씨가 그 정보를 알려주어서 보전 친구 너 댓 명이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서 맡아 무장해제 작업을 벌였다. 그 때 38선이 그어져 60여 년 동안 남북이 갈라져 온 것이다. 소련은 정말 교활했다. 미․영이 대동아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동안 소련은 일본하고 동맹관계였고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다. 미국의 B-29가 원자탄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리고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다시 투하하기 직전에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이 항복하자 소련은 만주 벌판을 함락하고 이북에 김일성을 키워서 들여보냈다. 그때 소련은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북한을 점령했다. 그 즈음 서울에서는 대한민국을 건국해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인촌 선생과 고하 선생은 공산당이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나가자 할 수 없이 국내 세력인 민족진영을 규합해 한민당을 조직했다. 이북 백남훈 선생, 부산 허정 선생, 경북 서상일 선생, 인촌 선생 등 집단지도체제를 세우고 명분상 이승만 김규식 김구 선생 등 3영수를 모시기로 했다. 그 분들이 귀국하는 대로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먼저 들어오고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는 미국에서 정부로 인정하지 않자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한편 미군은 포츠담에서 “한국을 해방시켜 지켜줘야겠다”고 약속했지만, 얄타밀약에서 “한국은 자주 독립을 할 능력이 아직 없으므로 당분간 5년 이상 신탁통치를 한 후에 독립을 시키자”는 결정으로 인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미․영․소)에서 합의된 대로 한국은 신탁통치를 한다고 발표했다. 그때 나는 보성전문 학생회 대표로 다시 복귀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는 좌익세력이 득세했으며 심지어는 설립자까지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인촌 선생 사모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보성전문학교 학생회 준비위원장으로 복귀했다. 나의 지휘 하에 보전학생들은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고 주장하며 시내에 신탁통치 반대 벽보를 부쳤다. 이화전문, 동국대학 등에도 신탁통치 반대 벽보를 부치며 지지 세력을 규합했다. 나는 신탁통치반대준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김구 선생이 계시는 경고장에 갔다. ‘신탁통치반대총위원회’를 만들어 한민당과 한독당 등 전 민족진영 이 반탁을 결의 했다. 우리도 학생회 일동으로 결사반대를 한다고 하니까 김구 선생이 내 손을 잡고 “우리 백만 학생의 원군이 왔소. 백만의 원군 아니오!”하며 반겼다. 반탁운동 투쟁을 하다 보니 과격하게 미군정 물러가라고 했지만 고하 송진우 선생이 과격하게 하지는 말라고 했다. 그런 이유 등으로 고하 선생이 일부 한독당의 영향을 받아 암살됐다고 나는 본다. 남로당의 박헌영이도 처음에는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고 했다. 1946년 1월 2일 공산당도 서울운동장에서 신탁통치 반대한다고 시민들을 동원해 놓고선 내부적으로는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찬탁)대회를 했다. 그런 반역적인 일을 했다. 李박사 反託운동 격려 “자네가 건국운동의 공신이네” 우리 학생운동지휘부는 내가 주동이 돼 1946년 1월 7일 중고등학교 대학전문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신탁통치 반대 학생결의대회를 열었다. 그 결과 찬탁하던 학생들과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의 좌익 학생들이 많이 돌아섰다. 반탁운동을 한 내가 볼 때 3.1운동은 미완성 운동이고 반탁운동은 완성된 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을 만든 운동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당시 소련 영사관에는 스티코프 소련 사령관이 있었고 미국의 정치 대표로 브라운 소장과 하지 군사령관이 나와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정부 수립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해서 1946~47년에 한국 대표를 만나 조선 정부를 세우는 준비를 했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신탁통치를 하기로 했는데, 당시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를 만나느냐 마느냐가 심각한 주요 의제였다. 이승만 박사는 반대를 했고 인촌 선생을 비롯한 한민당은 만나자고 찬성을 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조선 대표 33인을 뽑아 협상을 하자고 했는데 이승만 박사는 반대했다. 장덕수씨 등은 미소공동위원회와 적극적으로 만나 협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에서 신탁통치반대 연좌 학생데모를 하고 내가 자전거 위에 올라서서 여기서 학생 대표를 뽑아 미소공동위원회로 가 담판을 하자고 했다. 그 당시 장택상씨가 수도청장으로 미군정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학생들이 며칠째 데모를 하니까 그는 나를 덕수궁으로 불러 “내가 너 때문에 살이 내린다. 이놈아!”하더니 슬며시 나를 데리고 덕수궁 내 미소공동위원회를 찾아가는 게 아닌가. 장택상씨는 “내가 그래도 서울 치안을 맡은 수도청장인데 학생들이 반탁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데모를 하겠다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미소공동대표위원회에서 학생대표를 만나겠다고 해서 내가 시위대 앞으로 돌아와 자전거 위에 올라가 이 말을 전하고 학생대표 3인을 뽑아 덕수궁의 미소공동위원회로 갔다. 담 밖까지 몰려 온 학생들이 돌멩이를 던지니까 스티코프 소련 사령관은 나오지 않고 브라운 소장만 나왔다. 나는 브라운 소장을 보고 “저 밖을 보라. 우리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니 철회하라. 국부 이승만 대통령을 절대 지지한다. 우리는 즉각 독립해야겠다.” 이렇게 학생들 주장을 얘기 하니까 브라운 소장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알겠다”고 했다. 나는 나와서 브라운 소장에게 말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 그랬더니 시청 앞에 모인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남대문으로 해서 동대문 사거리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가 계시는 돈암장의 임영신씨가 보자는 연락이 와서 그곳에 가 이 박사에게 보고를 했다. 그랬더니 이박사가 나를 잡고 “자네 참 수고했네. 건국운동의 공신이네!”하며 진실로 칭찬을 해주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반탁운동이 결국은 대한민국의 결정적인 건국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공산당도 건국운동하다 찬탁운동을 하니까 미국이 어떻게 도울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하다 결국은 유엔에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유엔에서 한국감시위원단이 왔다. 인도인 메놈 위원장 등 몇 명이 왔다. 당시 유엔 감시단에게 잘 보이려고 김활란씨 등의 여성지도자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어 성대하게 접대하기도 했다. 이 유엔감시단이 38선을 넘어 북한을 가보려고 했지만 북에서 막아 가보지 못했다. 소련이 감시단을 북에 못 오게 했다. 李박사 ‘單選單政’ 결행 안했으면 한반도는 赤化 그래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이승만 박사는 ‘單選單政’을 주장했다. 남한만이라도 단독 선거를 통해 단독 정부를 수립해 보자고 주장했다. 가능한 지역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그 어려운 이야기를 이박사가 했다. 지금도 일부 문제 삼는 사람들은 단정을 비난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용기 있게 한 것이다. 그때 북한은 토지 개혁을 하고 인민군을 만들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돼 가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박사의 ‘단선단정’이 통일을 방해했다고 순진하게 말하고 있지만 당시 현실은 참으로 냉혹하고 심각했다. 그래서 결국은 유엔 감시 하에 5․10선거가 실시됐다. 그때 인구비례로 하면북한은 100석이고 남한은 200석이다. 그때 이북이 5․10선거를 함께 했으면 우리가 통일이 됐을 것이다. 처음 민주적 선거를 할 당시 이승만 박사는 청년, 여성 등 우익단체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5․10선거는 다른 나라의 보통 선거와는 다르고 자주독립운동의 연장이고 동시에 문명이 발달하지 않아 글자를 몰라 숫자가 적힌 투표용지가 아니라 작대기 하나 둘 그려서 하는 일명 ‘작대기 선거’다. 이는 민주화 운동이고 독립선거의 연장 선거이기 때문에 자네들이 나가야 되겠네.” 청년단체 활동을 하고 있는 어린 나에게도 선거에 나가라고 독려했을 정도다. 이 박사는 “덜 발달된 문명 속에서 자네들이 앞장서 계몽운동을 해 민주주의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거운동 채비를 해서 전주로 내려가 부친을 뵈니 “야! 이놈아 학생이 무슨 정치를 하냐?”며 불호령을 내리고는 집을 나가버리셨다. 우리 중부님은 제헌의원이었다. 내가 출마를 결심한 전주에는 벌써 경상도 달성 출신의 기독교 목사인 배은희 선생, 제1여당 한민당 공천자, 아버님 친구 분이 나왔고, 일제시대 친일파 곡성 면장인 신성균씨도 나왔다. 나를 포함해 우익은 4명이었는데 모두 분열이 되었다. 나는 9백 몇 십 표 차이로 차점으로 낙선하고 결국 좌익의 신성균(후에 북한에 감)이 당선되었다. 이 사람은 제헌국회 때 국회프락치사건의 주동자였다. 지금도 우익진영이 여럿으로 분열되고 좌익이 단일화되면 항상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다. 대한민국은 5․10선거를 통해서 건국이 되었는데 그때 모범 답안을 가지고 농공행상을 제대로 했으면 이렇게 분열이 안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때 우리 학생들 생각으로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김구, 내각총리에 김성수로 내각책임제를 하면 이상적이라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우리뿐만 아니라, 유진오씨나 한민당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더니 이시형씨를 부통령에, 이범석씨를 국무총리에, 또 구색을 맞춘다며 공산당을 하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임명해 놓으니까 그때부터 우익 청년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여순반란사건, 순천사건, 제주도폭동 등이 일어났다. 당시 여당인 한민당(채병덕씨가 사무총장)이 재야처럼 활동하던 것이 지금까지 나누어졌다. 李박사 내각제 안한 게 天與逸失 그때 이 박사께서 모범답안인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다면 자유당 몰락과 당신의 불행한 말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박사의 대를 잇기 위해서 이기붕씨를 내세우고 정권 연장을 위해 최인규를 내무장관에 앉혀 3․15 부정 선거를 강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4․19 학생혁명의 단초를 만들어 국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깎아내리게 된 것은 대단히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다. 나는 해방공간과 건국 기간 중 가까이서 이승만 대통령의 항일독립운동에서 건국운동을 지켜보았고 거들었다. 그리고 4․19 등의 일련의 과정을 죽 지켜본 헌정사의 증인인 셈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있어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애국애족의 정신과 국제적 감각을 갖춘 건국의 아버지로서 손색이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憲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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